노노상속 시대의 자금흐름
수도권 부동산 쏠림과 양극화

한국 사회의 상속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노노상속(老老相續)—부모와 상속인이 모두 고령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상속—이 일반화되면서, 자산의 ‘생산적 투자’로의 환류 속도가 둔화하고 있습니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상속세가 부과된 사례 중 80세 이상 피상속인의 비중은 최근 들어 절반을 넘었고, 2024년에는 80세 이상이 물려준 재산만 20조 원을 돌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속인은 은퇴 이후의 장기 생애주기를 고려해 위험을 줄이고 현금흐름을 안정화하려는 성향을 강화합니다. 게다가 증여세 최고세율 50%와 같은 부담 요인은 생전 증여를 통한 세대이전을 더디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자금은 ‘안전한 자산’에 머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노노상속의 부상과 ‘환류 지연’
상속이 고령층 내부에서 순환하면 소비·투자 의사결정의 프레임이 ‘성장’에서 ‘보존’으로 이동합니다. 상속인이 60~70대인 경우 은퇴 이후 의료·돌봄비, 기대수명 확대 등을 감안한 보수적 운용이 합리적 선택이 됩니다. 상속세를 납부한 케이스에서 80세 이상 피상속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과거 대비 크게 높아진 사실은 이러한 구조 변화를 방증합니다. 상속 개시 연령의 상향은 자연스럽게 상속인의 평균 연령을 끌어올리고, 상속 직후 재투자보다는 기존 자산 유지와 세부담 관리가 우선되는 경향을 강화합니다.
한편, 상속세·증여세 제도는 세대 간 자산 이전의 타이밍을 좌우합니다. 증여세 최고세율 50%의 누진 구조는 ‘생전 이전’의 비용을 높여 상속 시점까지 자산이 고령층에 잔존하도록 유도하는 비의도적 효과를 냅니다. 제도의 취지(형평과 재원 마련)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인 공제·특례를 통해 경제 전체의 자금순환을 개선하는 정책 설계가 요구됩니다.
안전자산 선호와 수도권 쏠림
노노상속 국면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선택은 ‘가치 보존형 자산’ 선호입니다. 2024년 기준 80세 이상 피상속인이 남긴 재산 20조3200억 원 중 약 4분의 3이 건물·토지 등 부동산이었습니다. 부동산은 현금화·증여가 상대적으로 어려워 생전 이전이 지연되는 동시에, 고령 상속인 입장에선 ‘가격 변동성이 낮고 장기 보유에 적합한 실물자산’으로 인식됩니다. 이러한 성향이 수도권 핵심 입지(서울·수도권)로의 자금 집중을 낳고, ‘똘똘한 한 채’ 수요와 겹치며 가격 지지력으로 작동합니다.
수급 동향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한국부동산원의 2025년 4월 조사에서 서울·수도권은 상승세(서울 +0.25%, 수도권 +0.07%)를 유지한 반면, 지방은 하락(-0.11%)으로 돌아섰습니다. 같은 시기 KB의 월간 리뷰 역시 강남권 규제 변화와 기대심리 자극 이후 서울 중심의 상승, 비수도권 약세를 확인합니다. 안정자산 선호와 지역 선택의 결합은 ‘상속 자금의 수도권 집중’이라는 구조적 흐름을 강화합니다.
부동산 양극화의 고착 위험
가격지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확대를 보여줍니다. 2025년 상반기 서울 주택 평균 매매가가 10억 원을 상회하고, 상위 20% 아파트 평균가격은 30억 원대를 넘어서는 등 ‘상·하위 분위 격차’가 커졌습니다. 수도권 내부에서도 핵심지와 외곽, 신축과 구축 간 괴리가 확대되는 양상입니다. 상속·증여를 통한 자금이 ‘희소성이 높은 지역·단지’로 유입될 경우, 자산가격 격차가 더 벌어지고 가계의 체감부담은 상승합니다. 이는 상속세 과세표준 구간 이행(과세대상 진입) 가속화와 납부 재원 압박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지역경제 관점에서도 수도권 쏠림은 투자 광맥의 편향을 고착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상속 자금이 신산업·지방 혁신생태계로 충분히 흘러가지 못하면 ‘성장의 씨앗’이 마를 수 있습니다. 개발이익이 집중된 지역은 추가 상승 기대가, 반대 지역은 거래 경색과 공실·빈집 등의 구조적 문제를 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주거·자산 불평등이 심화되고, 지역 간 자산 격차가 다음 세대로 누적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정책은 수요 억제 일변도를 넘어서 ‘자금의 생산적 회로’로 안내하는 인센티브 설계가 필요합니다.
소비 위축과 ‘자산 잠김’
인구 고령화는 소비의 연령 프로파일을 변화시키며 거시 소비를 둔화시킵니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고령화는 1996~2016년 가계소비를 연평균 약 0.9%p 낮춘 것으로 추정되며, 2020~2035년에도 연평균 약 0.7%p의 감소 압력이 지속될 전망입니다. 노노상속 확산은 소비성향이 낮은 고령층에 자산이 장기간 머무는 ‘자산 잠김’을 심화시켜 내수 둔화를 장기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잠김’은 단순한 심리 문제가 아니라 제도·인센티브의 결과입니다. 자산이 다음 세대에 더 이른 시점에 이전될 때 교육·주거·창업 등에서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지출로 전환되며 경제 활력이 살아납니다. 반대로 이전이 늦어지면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한 급매·차입 리스크만 키우고, 자산 포트폴리오의 경직성이 커질 수 있습니다. 정책 목표는 ‘부의 세대 간 선순환’이어야 하며, 세제·금융·정보 인프라가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세제·금융의 해법과 선택
최근 도입된 혼인·출산 증여재산공제(직계존속으로부터 1인당 1억 원 추가 공제)는 생애주기 이벤트를 계기로 자산이 더 이른 시점에 젊은 세대로 흘러가도록 설계된 장치입니다. 기존 기본공제(성인 자녀 10년 5천만 원)와 합치면 1인당 1억5천만 원, 부부 기준 양가 합산 최대 3억 원까지 ‘무세(無稅)’ 이전이 가능합니다. 또한 배우자 상속공제는 최소 5억~최대 30억 원 한도로, 일괄공제(5억) 등과 함께 상속세 과세표준을 실질적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제도의 요건·기한을 충족시키면 상속세·증여세 부담을 줄이면서도 ‘자산의 조기 순환’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고령층 보유 부동산의 유동화 채널을 넓히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택연금은 거주를 유지하면서 연금 흐름을 만들고, 등록면허세·지방교육세 감면(최대 50%·’27년 말까지)과 연금이자비용 소득공제(연간 200만 원 한도) 등 세제 혜택이 있어 상속세 재원 마련·현금흐름 안정에 유용합니다. 중장기적으로는 상속세 체계를 ‘유산총액 과세’에서 ‘상속인별 과세’로 전환하는 논의, 증여·상속 일관성 제고, 지역 균형형 투자 인센티브 도입 등을 통해 자금의 생산적 순환을 촉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노상속은 ‘누가, 언제, 어디에’ 돈을 쓰는가를 바꾸어 놓습니다. 고령층 내부에서 오래 머무는 자산은 안전자산 선호를 강화하고, 수도권 핵심지로의 자금 집중을 통해 부동산 양극화를 심화시킵니다. 동시에 고령화로 인한 소비 둔화 압력과 맞물려 ‘자산 잠김’이 길어지면 내수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제도의 목적은 단순한 과세가 아니라 ‘부의 선순환’이어야 합니다. 혼인·출산 공제, 배우자공제, 주택연금 등 이미 열려 있는 통로를 적극 활용하고, 정책당국은 지역·세대 균형을 고려한 인센티브 설계로 자금이 생산·혁신 영역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고령화가 구조화된 지금, 가계·기업·정부 모두 ‘보존에서 순환으로’ 관점을 전환할 때입니다.
노노상속연구소의 실전 팁
- 10년 주기 증여공제 분산 전략
성인 자녀는 직계존속으로부터 10년간 5천만 원(미성년자 2천만 원)까지 공제됩니다. 동일 그룹 합산 원칙(배우자 6억, 직계존속 5천만/2천만, 직계비속 5천만, 기타친족 1천만)을 감안해 수증자별·시점별로 나눠 이전하세요. 공모주·현금·지분 등 자산 유형별 평가·증빙을 남기면 사후분쟁과 과세 리스크를 줄일 수 있습니다. - 배우자공제·일괄공제 최적화
일괄공제 5억은 기본, 배우자공제는 최소 5억~최대 30억까지 가능하지만 ‘실제 상속분·법정상속분·한도’ 중 작은 금액과 ‘분할·등기 기한(신고기한 다음날부터 9개월)’ 요건이 핵심입니다. 유언·분할계획을 선제 설계해 배우자 지분을 현실적으로 확보하면 과세표준을 크게 낮출 수 있습니다. - 혼인·출산 공제+유동화 병행
혼인·출산 공제(1인 1억)와 기본공제(5천만 원)를 합쳐 1인당 1억5천만, 부부 합산 최대 3억까지 무세 이전을 설계하세요. 한편 노후 현금흐름과 상속세 재원은 주택연금으로 보강하면 등록면허세·지방교육세 감면과 이자비용 소득공제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증여·연금 실행 전에는 요건(혼인·출산 전후 2년)·한도·서류를 반드시 점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