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5월 19일

장롱예금

멈춰버린 돈의 그림자


장롱예금

평균수명의 연장과 저출산이 겹치면서 상속의 무게중심이 빠르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노노(老老)상속’이 일상이 된 것입니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80세 이상 피상속인으로부터 상속을 받아 상속세를 신고한 사례가 2010년 1,344건에서 2022년 1만237건으로 약 8배 늘었고, 2022년 상속세 신고의 절반가량이 80세 이상에서 발생했습니다. 70대까지 포함하면 70세 이상 고령 부모로부터의 상속 비중이 3/4 수준에 이릅니다. 상속인과 피상속인이 모두 고령화되면서 이전된 자산은 소비성향이 높은 30·40대로 흘러가기보다 노년층 내부에 머물 확률이 높고, 이는 ‘돈의 순환’이 둔화되는 거시적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고령화가 바꾼 상속의 연령 지도

노노상속의 급증은 단순한 인구구조의 결과를 넘어 자산의 ‘정착’ 문제로 연결됩니다. 국세청 ‘피상속인 연령별 상속세 신고 현황’(TASIS)을 보면 2023년에도 70·80대 비중이 여전히 압도적입니다. 상속이 고령층 내부에서 오가면 자산 운용은 자연히 보수적으로 변하고, 생애주기상 소비·투자 여력이 큰 연령대로의 유동성이 약화됩니다. 자녀세대의 주택 구입·교육·창업 등 고액 수요와 연결되지 못하는 자산이 늘수록 민간소비의 회복 탄력은 떨어지고 성장잠재력도 갉아먹힙니다. 

주택 보유자 역시 ‘고령화’가 뚜렷합니다. 통계청 ‘주택소유통계’에 따르면 전체 개인 주택 소유자는 늘었지만, 연령별로는 50·60대가 큰 축을 형성합니다. 이 흐름은 젊은 층의 자산 형성 기회를 제약하고, 상속 시점이 늦어질수록 세대 간 자산 이동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정책적 유인 없이 시장 자생적 순환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면입니다. 

현금 선호와 ‘장롱예금’의 팽창

저금리 장기화와 위험회피 성향은 현금·예금 선호를 키워왔습니다. 일본 가계 금융자산에서 ‘현금·예금’ 비중은 2025년 1분기 기준 51%로, 미국(11.5%)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한국도 2021년 43.4%였던 현금·예금 비중이 금리 상승기(2023년)에 46%대까지 올라간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는 투자 여력의 위험자산 유입을 약화시키고, 실물·금융시장의 선순환을 제약합니다. 

극단적 형태는 은행권 밖으로 ‘숨는 돈’입니다. 일본에서는 오랜 침체와 저금리가 겹치며 ‘집안 금고 속 현금’(장롱예금)이 60조 엔 수준으로 추정된 바 있습니다. 최근 금리와 치안 이슈 변화로 2023년 1월 대비 2025년 7월 시점 추정치가 약 47조 엔으로 줄었다는 보도도 있어지만 장롱예금이 상당한 규모 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2017년 한은 자금순환 통계 분석 기준 가계 현금자산이 71조 원을 넘어섰던 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 은행계정조차 거치지 않고 사회적 순환에서 이탈하는 경향’ 자체가 내수 활력에 부정적이라는 점입니다. 

치매머니: 경제에서 동결된 자산

인지기능 저하로 사실상 사용되지 못한 채 묶이는 ‘치매머니’는 고령사회가 겪는 또 다른 그늘입니다. 우리나라는 정부 첫 전수조사(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건보공단·서울대 건강금융센터)에서 2023년 기준 치매머니를 약 154조 원(GDP의 6.4%)으로 추산했고, 2050년에는 488조 원(예상 GDP의 약 15.6%)까지 늘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자산 구성은 부동산 비중이 압도적이며, 금융자산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단순한 가족 문제를 넘어 ‘동결된 거대 자산’이 소비·투자로 회전하지 못하면서 거시경제 활력도를 떨어뜨릴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제도적 대응 수단은 이미 준비돼 있습니다. 성년후견제도(법원 심판형/임의후견)로 재산·법률행위를 보호하고, ‘후견지원신탁(치매신탁)’ 등 신탁 장치를 활용하면 병원비·간병비·생활비를 사전에 설정된 룰로 집행해 ‘동결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금융당국은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 차원에서 치매신탁 활성화를 꾸준히 추진해 왔습니다. 가족과 당사자가 인지능력이 충분할 때 후견·신탁 설계를 선제적으로 해두면 ‘돈이 멈추는’ 리스크를 크게 낮출 수 있습니다. 

일본의 ‘조손증여’에서 배워야 할 것

일본은 노노상속의 그림자를 완화하기 위해 2013년 ‘교육자금 증여 비과세’(손·자녀 1인당 최대 1,500만 엔), 2015년 ‘결혼·자녀양육 자금 일괄증여 비과세’(최대 1,000만 엔, 결혼 관련 300만 엔 한도) 등 젊은 세대로의 조기 자산 이전을 유인해 왔습니다. 

한국도 2024년부터 ‘혼인·출산 증여재산 공제’가 신설됐습니다. 혼인신고일 전후 각 2년(총 4년) 또는 자녀 출생·입양일로부터 2년 이내에 직계존속이 증여하면 최대 1억 원까지 기본공제와 별도로 추가 공제됩니다. 제도 요건과 적용 시점(증여일 2024.1.1. 이후)을 정확히 지키면 실질적인 세대 간 자금이동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세제와 금융으로 ‘돈의 순환’을 만들어야.

개인 차원에서는 ‘분산·분할·사전’ 원칙에 맞춰 준비해야 합니다. 성인 자녀에 대한 10년 주기 5,000만 원 기본공제(미성년 2,000만 원), 배우자 6억 원 공제를 활용한 자산 분산은 상속세·증여세 부담을 완화하고 현금 흐름를 앞당기게 합니다. 또한 상속 개시 10년(상속인이 아닌 자는 5년) 이전의 사전증여분은 상속재산에 합산되지 않으므로, 장기 플래닝을 통해 합법적으로 세부담을 경감하고 자산 순환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기업가 가정이라면 ‘가업승계’ 제도도 검토할 때입니다. 가업상속공제는 업력과 종사·지분·고용유지 등 요건을 충족하면 최대 600억 원 한도로 공제할 수 있고(경영기간 구간별 한도), 2024년부터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특례의 10% 저율과세 구간이 120억 원으로 확대되는 등 제도 여건이 개선됐습니다. 이는 경영권 안정과 세대 간 투자유인을 함께 도모하는 수단입니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돈이 어디에서 멈추는가”입니다. 상속 시점이 늦어지고, 현금성 자산이 노년층에 과도하게 축적되며, 인지저하로 자산이 동결되면, 교과서의 투자·소비 선순환은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제도 인센티브(혼인·출산 공제, 가업승계 특례), 금융장치(후견·신탁), 가족의 장기 플랜(분산·사전증여·리밸런싱)이 맞물리면 자산은 더 어린 생애주기로 흘러 들어가 교육·주거·창업·투자로 전환되고, 경제는 숨을 쉽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부의 대물림 거부감’이 아니라, 합법적·합리적 설계를 통한 ‘세대 간 순환 전략’입니다. 자산을 움직이게 하는 정책과 개인의 결단이 함께할 때, 멈춘 돈은 다시 속도를 찾습니다. 

노노상속연구소의 실전 팁

  • 타이밍에 맞는 사전증여
    상속 개시 전 10년(상속인이 아닌 자는 5년) 이내 증여 재산은 상속재산에 합산됩니다. 여유가 있다면 최소 10년 전부터 분할 증여 계획을 세워 합산 리스크를 피하세요. 성인 자녀 10년 기본공제 5,000만 원, 배우자 6억 원 공제를 주기적으로 활용하면 세부담을 줄이며 자산을 앞세대에서 뒤세대로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 혼인·출산 공제 활용
    2024.1.1. 이후 증여, 혼인신고일 전후 각 2년 또는 출생·입양일로부터 2년 이내, 직계존속이 증여—이 세 가지를 충족하면 최대 1억 원 추가 공제(기본공제와 별도)가 가능합니다. 혼인일은 ‘결혼식’이 아니라 ‘혼인신고일’ 기준이므로 신고 시점을 놓치지 마세요. 둘째·재혼도 요건 충족 시 적용됩니다.
  • 치매 리스크 대비
    후견·신탁 이중 안전장치: 인지능력이 충분할 때 ‘임의후견계약’과 ‘후견지원신탁(치매신탁)’을 병행하세요. 신탁계약에 병원비·간병비·생활비 집행 규칙을 명시하면 ‘치매머니’ 동결을 줄이고 가족 분쟁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법원 심판형 성년후견과의 연계, 수탁 재산·서류 요건을 금융기관과 사전에 점검해 두면 비상시 집행 지연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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